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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사키 다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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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사키 다쿠는 1936년 다롄에서 태어나 브리지스톤 근무 후 정치에 입문하여 후쿠오카현 의원, 국회의원, 방위청 장관, 건설대신 등을 역임했다. 그는 자민당 내에서 YKK를 결성하고 간사장, 부총재를 지냈으며, 2003년 낙선 후 총리보좌관을 역임했다. 대북 외교, 특히 북핵 문제 해결과 납치 문제 해결에 힘썼으며, 중국, 한국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헌법 개정을 주장하며 안보 정책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여성 스캔들, 대북 정책 관련 논란,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21년에는 입헌민주당 후보를 지지하여 자민당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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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사키 다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05년, 후쿠오카시미나미구의 오하시역 앞에서
이름야마사키 다쿠
출생일1936년 12월 11일
출생지일본 제국간토주다롄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랴오닝성 다롄시)
학력와세다대학교 제1상학부 졸업
직업브리지스톤 사원
소속 정당자유민주당 (구 와타나베파야마사키파)
칭호/훈장[[파일:JPN Kyokujitsu-sho 1Class BAR.svg|40px]] 욱일대수장
영년 재직 의원중의원
학사 학위상학사 (와세다대학교)
웹사이트taku.net (2018년 12월 15일 시점의 아카이브)
정치 경력
내각미야자와 내각
임기 시작1991년11월 5일
임기 종료1992년12월 12일
내각우노 내각
임기 시작1989년6월 3일
임기 종료1989년8월 10일
내각제2차 나카소네 제1차 개조 내각
임기 시작1984년11월 1일
임기 종료1985년12월 28일
선거구(구 후쿠오카 1구 →) 후쿠오카 2구
당선 횟수12회
임기 시작1972년12월 10일 - 2003년10월 10일, 2005년4월 24일
임기 종료2009년7월 21일
선거구후쿠오카시・사하라군 선거구
당선 횟수1회
임기 시작1967년4월 23일
임기 종료1969년12월 7일
기타 경력
자유민주당 부총재(총재: 고이즈미 준이치로)
임기 시작2003년9월 21일
임기 종료2003년11월 9일
제40대 자유민주당 간사장(총재: 고이즈미 준이치로)
임기 시작2001년4월 24일
임기 종료2003년9월 21일
제41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총재: 하시모토 류타로)
임기 시작1995년
임기 종료1998년
제41대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총재: 고노 요헤이)
임기 시작1995년
임기 종료1995년
이전 직책
이전유지 오쓰카
이후기시로 나카무라
이전기치로 다자와
이후주로 마쓰모토
이전미즈히라 도요히코
이후카라사와 슌지로
이전고가 준이치로
이후이나토미 슈지
이전다선거구
이후고가 준이치로

2. 생애

야마사키 다쿠는 제2차 세계 대전만주국 다롄에서 태어나 종전 후 후쿠오카현으로 이주했다. 와세다 대학에서 상학 학위를 받고 브리지스톤에서 5년간 근무한 후, 1967년 후쿠오카현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나카소네 야스히로에게 발탁되어 1969년 총선에 도전했으나 낙선했고, 1972년 총선에서 중의원 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었다.

2. 1. 청년기

1936년 관동주 다롄시에서 만철조사부원이자 훗날 사가미 여자 대학 학장을 지낸 야마사키 스스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야마사키가 태어난 날, 그의 외할아버지가 후쿠오카현 미이케군에서 탄광 개발에 성공하여, 아버지 스스무에게 전보를 보내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개척을 뜻하는 '開(개)' 자로 지으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같은 개척의 의미를 가진 '拓(척)' 자를 선택하여 아들의 이름으로 삼고, 탄광 개발과 만주 개척의 의미를 담아 '히라쿠'라고 읽도록 했다. 그의 할아버지인 야마자키 와사부로는 이즈카 탄광을 경영했으며, 겐요샤의 간부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귀국하여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에 정착해 성장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사고로 한쪽 눈을 실명했다. 후쿠오카 교육대학 부속 후쿠오카 중학교와 후쿠오카 현립 슈유칸 고등학교[17][18]를 거쳐 와세다 대학교 제1상학부를 졸업하고 상학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시절에는 유도 선수로 활동하며 한쪽 눈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이노쿠마 이사오에게 승리한 경험이 있다. 학업 성적도 우수하여 오쿠마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타이어 제조업체 브리지스톤에서 5년간 샐러리맨 생활을 했다. 퇴사 후 고향으로 돌아와 헤이와다이 구장에서 슈마이 판매점을 경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2. 2. 정치 경력

1967년 후쿠오카현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당시 자민당의 실력자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에게 발탁되어, 그의 추천으로 1969년 총선거에 보수계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낭인 생활을 거쳐 1972년 총선거에서 중의원 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었다. 당시 당선 동기로는 이후 정치적 동지가 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가토 고이치를 비롯해 이시하라 신타로, 미츠즈카 히로시 등이 있었다. 당시 자민당 내에서는 드물게 세습 정치인이 아니었으며, 점차 방위 정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국회의원 재임 기간 동안 방위청 장관(우노 내각), 건설대신(미야자와 내각) 등을 역임했다.

돗토리시 사지정에 있는 국도 482호선 승격 기념비. 새겨진 글씨는 1992년 당시 건설대신이었던 야마사키 다쿠의 것이다.


1984년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1차 개조 내각에서 내각관방 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서독 에서 열린 G8 정상회담에 참석했을 때 동행하여, 나카소네 총리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헬무트 콜 독일 총리 등 각국 정상과 가진 개별 회담 내용을 기록하고 이를 기자단에 브리핑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외무성 관료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나카소네 총리의 의중을 파악하고 국제 여론을 주도하는 방향으로 브리핑을 진행하려 노력했다.

1990년 무렵부터 당시 자민당을 장악하고 있던 게이세이카이(다케시타파)의 정치 운영 방식을 비판하며, 중의원 당선 동기인 가토 고이치,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함께 정치 그룹 YKK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1995년 하시모토 류타로가 자민당 총재로 선출되자 자민당 정조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998년에는 기존의 구 와타나베파에서 독립하여 자신의 파벌인 근미래정치연구회(야마사키파)를 창설했다.

경제 정책 면에서는 일본이 장기 경제 침체에 접어든 1990년대 후반 경기 부양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자민당 정조회장 시절 정부가 관리하는 우편 저축과 보험 기금을 주식 시장에 투자하고 통신, 환경, 교육 관련 정부 지출을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2][3]

1999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여 총재직에 도전했으나, 51표를 얻어 당시 총리였던 오부치 게이조(350표)와 가토 고이치(113표)에 이어 3위에 그쳤다.[5] 2000년 11월, 모리 내각을 무너뜨리기 위해 가토 고이치와 함께 이른바 가토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갔다.[7] 이 사건으로 가토파는 많은 이탈자가 발생하며 파벌이 분열되는 등 큰 타격을 입었지만, 야마사키파는 자민당 주류파의 와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이탈자가 거의 없어 야마사키의 정치적 구심력과 영향력은 크게 손상되지 않았고, 이는 이후 정치적 재기의 발판이 되었다.

2001년 YKK의 동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총리로 취임하여 고이즈미 내각이 출범하자, 당내 서열 2위인 자민당 간사장에 발탁되었다.[8] 당내 기반이 취약했던 고이즈미 총리를 당내 저항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는 방패 역할을 수행했으며[9], 외교 경험이 부족했던 고이즈미를 보좌하여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준비, 동남아시아중동 순방 등 외교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노무현 대한민국 대통령과의 회담을 주선하기도 했으며, 9·11 테러 이후에는 여당 3당 긴급 대책 협의회 의장을 맡아 자위대법 개정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등 안보 정책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포스트 고이즈미'의 유력 주자로 다시 부상했지만, 동시에 당내 저항 세력으로부터 간사장 교체 요구도 거세졌다. 2003년 9월, 고이즈미 총리는 지지율 하락에 따른 내각 개편 과정에서 당내 지지 기반 강화를 위해 야마사키를 간사장에서 자민당 부총재로 승진시키는 형태로 인사를 단행했다.[12]

그러나 부총재 취임 직후인 2003년 11월 총선거에서 후쿠오카 2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는 2002년 3월부터 주간지를 통해 약 1년 반 동안 보도된 애인 스캔들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야마다 가나코라는 여성이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야마사키의 10년간 정부였다"고 주장하며 야마사키가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고 폭로했고, 야마사키는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으나 해당 주장이 사실이라는 이유로 기각되기도 했다.[10] 이 스캔들로 인해 31년간 지켜온 중의원 의석을 잃고 부총재직에서도 사임했다. 그의 지역구는 도시 지역인 후쿠오카현으로, 유권자 이동이 잦아 야당 후보에게 유리한 격전지였으며, 이전 1996년과 2000년 총선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벌인 바 있다.[10]

한편, 야마사키는 정치자금 문제로도 여러 차례 논란에 휩싸였다. 1997년에는 소득세 탈세 및 사기 혐의를 받던 석유 도매업자가 국회 위원회 증언에서 야마사키에게 정치 헌금 명목으로 2.78억을 제공했으며, 이 중 상당액이 다른 후보들에게 전달될 예정이었다고 주장했다.[4] 2002년 9월에는 야마사키의 자금 관리 단체가 건설 회사로부터 받은 기부금을 구마모토현 가와베가와 댐 건설을 지지하던 무소속 의원 가네코 야스시에게 전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11]

낙선 후 2004년 9월 제2차 고이즈미 내각 개조 내각에서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으로 임명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2005년 4월, 고가 준이치로(야마사키를 낙선시킨 민주당 의원이었으나 학력 위조 스캔들로 사임)의 사임으로 치러진 후쿠오카 2구 중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고이즈미 총리는 야마사키를 지원하기 위해 후쿠오카를 두 차례나 방문하며 유세를 도왔다.[15] 같은 해 9월 총선거에서도 당선되어 12선 고지에 올랐다.

고이즈미 총리의 임기 만료가 다가오면서 아베 신조, 아소 다로와 함께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2006년 9월 아베 신조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2009년 총선을 앞두고는 가토 고이치와 함께 당시 위기에 처한 자민당을 대신할 신당 창당을 고려하며 가메이 시즈카, 오자와 이치로 등과 접촉하기도 했으나 결국 자민당에 잔류했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민주당의 신인 이나토미 슈지에게 큰 표 차이로 패배하여 낙선했다. 자민당의 정년 규정으로 인해 2010년 참의원 선거 비례대표 출마 자격을 얻지 못했고, 2012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를 은퇴했다.

=== 주요 경력 ===

연도내용
1967년후쿠오카현 의회 의원 당선
1969년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후쿠오카 1구, 무소속) 낙선
1972년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후쿠오카 1구, 무소속) 당선 (첫 당선)
1976년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후쿠오카 1구, 자민당) 당선 (2선)
1978년후생정무차관 취임 (제1차 오히라 내각)
1979년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후쿠오카 1구, 자민당) 당선 (3선)
1980년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후쿠오카 1구, 자민당) 당선 (4선)
방위 정무차관 취임 (스즈키 젠코 내각)
1983년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후쿠오카 1구, 자민당) 당선 (5선)
1984년내각관방 부장관 취임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1차 개조 내각)
1986년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후쿠오카 1구, 자민당) 당선 (6선)
1989년방위청 장관 취임 (우노 내각)
1990년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후쿠오카 1구, 자민당) 당선 (7선)
1991년건설대신 취임 (미야자와 내각)
1993년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후쿠오카 1구, 자민당) 당선 (8선)
1995년자민당 정조회장 취임 (하시모토 류타로 총재 체제)
1996년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후쿠오카 2구, 자민당) 당선 (9선)
1998년구 와타나베파 이탈, 야마사키파 (근미래정치연구회) 결성
1999년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 3위 낙선
2000년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후쿠오카 2구, 자민당) 당선 (10선)
가토의 난 참여 및 실패
2001년자유민주당 간사장 취임 (고이즈미 내각)
2003년자유민주당 부총재 취임 (9월)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후쿠오카 2구, 자민당) 낙선 (11월), 부총재 사임
2004년내각총리대신 보좌관 취임 (제2차 고이즈미 내각 개조 내각)
2005년중의원 보궐선거 (후쿠오카 2구, 자민당) 당선 (11선, 4월)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후쿠오카 2구, 자민당) 당선 (12선, 9월)
2009년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후쿠오카 2구, 자민당) 낙선
2012년정계 은퇴 선언



=== 소속 의원 연맹 등 ===


  • 자유민주당 조선반도 문제 소위원회 (최고 고문)
  • 장애 보건 복지 추진 의원 연맹 (회장)
  • 국립 추도 시설을 생각하는 모임 (회장) - 야스쿠니 신사와 별도로 새로운 추도 시설 건설 목표
  • LPG 대책 의원 연맹 (회장)
  • 유엔 해비타트(유엔 인간 정주 센터) 추진 의원 연맹 (회장)
  • 일본·인도네시아 우호 의원 연맹 (회장)
  • 일본·베트남 우호 의원 연맹 (명예 회장)
  • 일한 의원 연맹
  • 일조 국교 정상화 추진 의원 연맹 (회장)
  • 베이징 올림픽을 지원하는 의원 모임
  • 자민당 규슈 블록 양원 의원회 (회장)
  • 자민당 장애 보건 복지 추진 의원 연맹 (회장)
  • 일본 약장수 의원 연맹 (회장)
  • 유상 진료소 활성화를 목표로 하는 의원 연맹 (회장)
  • 자민당 전국 보육 관계 의원 연맹 (고문)
  • 신 헌법 제정 의원 동맹 (고문)
  • 유도 진흥 의원 연맹 (최고 고문)
  • 일본 소프트볼 협회 (회장)
  • 후쿠오카현 볼링 연맹 (회장)

2. 3. 낙선 후 활동

2004년, 고이즈미 총리의 배려로 민간인 신분으로 자민당 헌법조사특별고문 및 총리 보좌관에 취임했다.[14] 2005년 4월, 후쿠오카현 제2구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 의원직을 되찾았다. 당시 고이즈미 총리는 야마사키를 위해 후쿠오카를 두 번 방문하며 지원 유세를 펼쳤다.[15] 이후 우정민영화법안을 심의하는 특별위원회 간사(수석 이사)로서 고이즈미의 우정민영화를 적극 지원했으나, 우정 해산을 기점으로 고이즈미와 점차 거리를 두게 되었다. 같은 해 말 자민당 안전보장조사회장에 취임했으며, 이후 중국, 대한민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가토 고이치, 후쿠다 야스오, 고가 마코토 등과 연계를 강화했다.

2006년 아베 신조 내각이 출범하자 대북 정책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 야마사키는 아베 총리의 외교가 지나치게 압력에 의존하여 일본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국익을 해친다고 비판했다.

2007년 1월, 북한을 방문하여 교착 상태에 빠진 북핵 문제와 납치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 평양에서 북한의 송일호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담당대사와 회담하며 북한의 핵 포기와 납치 피해자의 일본 귀국을 요구했으나,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같은 해 9월 아베 총리가 사임하자 후임 총재로 후쿠다 야스오를 지지했으며, 후쿠다 야스오 내각 출범 후 자민당 외교조사회장에 취임하여 외교 및 안전보장 정책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아소 내각에서도 외교조사회장직을 유지했다.

2009년 제45회 중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가토 고이치와 함께 신당 창당을 모색했다. 국민신당 대표 대행 가메이 시즈카의 중개를 통해 당시 민주당의 오자와 이치로와 회담하기도 했으나[19], 신당 창당은 결국 실패했다. 자민당 공천으로 총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자민당 역시 선거에서 대패했다. 낙선 후에도 파벌 회장직은 2012년 이시하라 노부테루에게 물려줄 때까지 유지했다.

2010년 제22회 참의원 선거에 비례대표로 출마하려 했으나, 자민당의 정년 규정으로 인해 공천을 받지 못했다. 2010년 3월경에는 가메이 시즈카로부터 국민신당 입당을 전제로 한 내각 참여 제안을 받았으나 즉시 거절했다.[20]

2012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 은퇴를 발표했다. 이후 자신이 설립한 근미래 정치 연구회(구 야마사키 파)의 최고 고문을 맡았다.

2015년 가메이 시즈카, 후지이 히로히사, 다케무라 마사요시 등과 함께 아베 신조 내각이 추진하던 안보 관련 법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16] 같은 해 3월 11일에는 사토야마・소망의 회 결성에 참여했다.[21][22]

2016년 7월, 가토 고이치, 고이즈미 준이치로와의 정치 동맹 YKK를 회고하는 『YKK 비록』을 출판했다. 9월 가토 고이치가 사망하자 합동 장례식에서 조사를 통해 "소위 가토의 난에 대해, 그것을 막지 못했던 제가 잘못했습니다. 죄송하다는 말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23]

2018년 3월 14일, 이시바 파의 헌법 개정 관련 공부회에 강사로 초청되었다.[24]

2021년 제49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오사카 10구에 자민당 전직 오쿠마 가즈히데가 입후보했음에도 불구하고, 10월 27일 입헌민주당의 쓰지모토 기요미 후보 지원 유세에 나섰다. 야마사키는 "우정 때문"이며 "쓰지모토 씨 개인을 응원하러 갔다"고 설명하면서도, "야당 제1당인 입헌민주당의 의석 확보가 여야 균형을 위해 중요하다"고 발언했다.[25][26][27] 이 일로 인해 같은 해 12월 13일 자민당 당기위원회로부터 당의 규율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당원 자격 정지 1년 처분을 받았다.[28] 모리야마 파(구 야마자키 파) 최고 고문직도 1년간 정지되었다.[29]

3. 정책 및 정치 성향

자유민주당 소속 정치인으로서 당내에서 독자적인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대북 외교에서는 북한과의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중시했으며, 헌법 9조 개정을 통한 자위대의 군대화 등 안전 보장 분야에서도 명확한 주장을 펼쳤다. 경제적으로는 침체기 극복을 위해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옹호했다.

3. 1. 외교 정책

(내용 없음)

3. 1. 1. 대북 외교

야마사키는 북한의 비핵화와 납치 문제 해결을 통한 북일 국교 정상화를 자신의 주요 정치 과제 중 하나로 삼았다. 그는 문제 해결 방식으로 압력과 제재보다는 대화를 중시하는 입장을 견지하며 북한 정부 관계자와도 빈번히 회담을 가졌다.

2004년 4월 1일, 야마사키는 히라사와 가쓰에이와 함께 중국을 극비리에 방문하여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 고위 관리와 직접 교섭을 시도했다.[30]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대북 외교 창구를 정부 간 루트로 일원화하려는 당시 일본 정부의 방침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받았으며[30], 구출회 등 납치 피해자 관련 단체로부터 납치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31]

2006년 6월 14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후임을 뽑는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대북 강경파인 아베 신조가 유력 후보로 떠오르자, 야마사키는 "'포스트 고이즈미'의 중요 과제는 '북일 국교 정상화'"라고 강조하며 후쿠다 야스오에게 출마를 요청했으나 후쿠다는 출마하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아소 다로 당시 외무대신이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의 핵무장 가능성을 시사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야마사키는 "북한의 핵 개발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나라(일본)도 하겠다는 논의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2007년 9월 18일에는 한 강연에서 북한의 핵 실험에 대해 "핵 보유가 확실해졌다는 의미에서 좋게 했다"고 발언하여 논란을 일으켰으나, 이후 "북한의 핵 실험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취지였다"고 해명했다.

2008년 6월 12일, 야마사키가 회장을 맡고 있던 북일 국교 정상화 추진 의원 연맹이 북한에 대한 제재 해제와 대화 노선으로의 전환을 주장하자, 아베 신조는 "국회의원이 협상 중인 정부보다 더 관대한 이야기를 하면 정부의 외교 교섭 능력을 크게 훼손한다. 백해무익하다"고 비판했다. 이에 야마사키는 "압력 일변도는 유치한 생각이며,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고 반박했다. 두 사람의 대립은 계속되어, 아베가 "대화 노선으로 납치 문제가 진전되지 않았음을 학습하기 바란다"고 하자, 야마사키는 6월 28일 TV 니시닛폰 프로그램에서 "아베 전 총리의 대북 외교는 개 짖는 소리와 같다. 고이즈미 전 총리처럼 직접 찾아가 협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2002년 이후 북한을 방문하지 않은 아베를 강하게 비판했다.[32] 또한 그는 "국민 감정으로 '납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으면 그 이후는 아무래도 좋다'는 감각이 너무 지나치다"며 납치 문제에만 매몰된 일본 내 여론에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같은 해 7월 24일, 일본 정부가 납치 문제 진전 없이는 북한에 대한 경제·에너지 지원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히자, 야마사키는 "중국이나 한국 등과의 관계에서 일본이 궁지에 몰릴 것이다. 6자 회담에서의 한반도 비핵화 실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우려를 표하며 6자 회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09년 3월 18일, 북한이 미사일 발사 실험을 예고하자 아소 다로 당시 총리는 요격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야마사키는 "실험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대화밖에 없다"며, "북한의 김영일 총리가 베이징에 간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다. 제재를 강화해도 괜찮지만, 지금까지 효과는 거의 없었다. 국제 사회와 발을 맞춰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중국과의 연계를 통한 대화 노선을 촉구했다.

3. 1. 2. 기타 외교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기타 외교' 섹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본 소스는 야마사키 다쿠의 2004년 이후 국내 정치 활동과 정계 은퇴 과정에 대한 내용입니다.

3. 2. 안전 보장 정책


  • - 야마자키 타쿠, 『헌법 개정 - 도의 국가를 목표로』, 「제2부 스스로 지키는 일본 (5, 새 헌법의 안전 보장 규정)」

3. 3. 기타 정책

일본이 경제 침체기에 접어든 1990년대 후반, 야마사키는 경기 부양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다.[2][3] 당시 자유민주당 정책 연구 회장으로서 그는 정부가 관리하는 우편 저축 및 보험 기금을 주식 시장에 투자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통신, 환경, 교육 관련 프로젝트에 대한 정부 지출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옹호했다.[2][3]

4. 논란 및 비판

(내용 없음)

4. 1. 여성 스캔들

2002년 4월 주간문춘은 야마사키가 통일교 신자와 불륜 관계에 있으며 이로 인해 국가 기밀이 누설될 위험이 있다고 보도했다.[41][42][43] 이를 시작으로 여성 관련 스캔들이 연이어 언론에 의해 다루어졌다. 정치 평론가 미야케 히사유키는 "야마타쿠(야마사키의 애칭)의 변태 문제는 정국이 될 수 있다"고 평할 정도로[41], 이 스캔들은 야마사키의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야마사키는 주간문춘의 2002년 4월 4일자 보도에 대해 명예훼손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도쿄 지법은 "통일교는 영감상법으로 고액 상품을 판매한다고 지적받는 단체이며, 이러한 단체와 관련된 인물에 대해 정치인 실격이라는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위법성이 없다", "이는 정치인으로서의 적격성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라고 판단하며 야마사키의 청구를 기각했다.[44]

2003년 4월에는 야마다 가나코라는 여성이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이 "야마사키의 10년간의 정부였다"고 주장하며, 야마사키가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고 폭로했다.[10] 야마사키는 야마다를 상대로도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해당 폭로 내용이 사실에 부합한다고 판단하여 소송을 기각했다.[10] 야마다의 폭로 이후, 야마사키는 자유민주당 부총재가 되었고, 기존에 맡고 있던 사무총장직은 아베 신조에게 넘어갔다.[12]

하지만 2003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야마사키는 민주당의 고가 준이치로에게 패배하며 의원직을 잃었고, 이후 자유민주당 부총재직에서도 물러났다.[13] 낙선 후 야마사키는 주간문춘과의 소송에서 도쿄 고등 법원에 제기했던 항소를 취하했고, 이로써 도쿄 지법의 판결이 최종 확정되었다.[45][46][47] 이 일련의 스캔들은 야마사키의 정치적 생명력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결과적으로 두 번의 낙선으로 이어지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41]

4. 2. 기타


  • 1999년, 제12회 일본 안경 베스트 드레서 상을 정계 부문에서 수상했다.[33]
  • 2003년 4월 22일, 춘계 예대제에 맞춰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당시 하시모토 류타로, 고가 마코토, 히라누마 다케오, 니카이 도시히로 등 다른 정치인들도 함께 참배했다.
  • 2005년 5월 21일, 우정 민영화를 둘러싸고 중의원 해산 총선거 가능성이 제기되자, 자민당 현 연합 파티에서 "중의원 해산·총선거는 고이즈미 정권의 블러프(협박)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해산되면 가장 곤란한 사람은 지난달에 당선된 저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2005년 4월 보궐 선거에서 당선된 사실을 언급해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 2012년 가을 서훈에서 최고위인 욱일대수장을 수여받았다. 황거 궁전 "마츠노마"에서 열린 친수식에서 천황으로부터 직접 훈장을 받았다.[36]
  • 2015년 12월 9일, 헌정 기념 회관에서 열린 쓰지모토 기요미 의원의 정치 자금 모금 파티 "정치 활동 20주년을 향한, 감사와 비약의 모임 in 도쿄"에 참석했다.[37]
  • 2021년 10월 제4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10월 27일 오사카 10구에 자민당 소속 오쿠마 가즈히데 후보가 출마했음에도 불구하고, 입헌민주당 소속 쓰지모토 기요미 후보를 지원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에서 "소선거구는 쓰지모토 기요미, 비례대표는 자민당"이라고 발언했다.[38] 이 행동으로 인해 같은 해 12월 13일 자민당 당기위원회에서 당규 위반을 이유로 당원 자격 정지 1년 처분을 받았다.[28] 야마사키는 쓰지모토를 지지한 이유에 대해 "한마디로 우정 때문이다. 입헌민주당을 응원하러 간 것이 아니라 쓰지모토 개인을 응원하러 갔다"[39], "야당 제1당인 입헌민주당의 의석 확보는 여야 균형과 자공 정권 견제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쓰지모토 개인은 국회에 필요한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내가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40]
  • 존경하는 인물로는 도쿄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사형된 전 총리 히로타 고키를 꼽는다. 히로타 고키는 야마사키의 모교인 슈유칸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하다.[34]
  • 중일 국회의원 서화전에 서화를 출품하기도 했다.[35]
  • 유도, 야구, 바둑을 즐기며, 소프트볼은 지역 사무소에서 '타쿠 선데이즈'라는 팀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경기를 하고 있다. 또한 일본 소프트볼 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 통칭 '야마타쿠' 외에 '타쿠 씨', '야마타후' 등의 애칭으로 불린다.[4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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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스 Korean Exports Surge; Stocks Follow the Lead https://www.latimes.[...] Los Angeles Times 1998-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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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뉴스 Izui tells Diet he gave 278 million yen to LDP lawmakers https://www.japantim[...] The Japan Times Online 1997-11-28
[5] 뉴스 Premier Reelected as Ruling Party Chief https://www.latimes.[...] Los Angeles Times 1999-09-22
[6] 뉴스 Patient, clever Mori comes into his own {{!}} The Japan Times https://www.japantim[...] The Japan Times 2017-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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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뉴스 New Cabinet In Japan Emphasizes Fiscal Reform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03-09-23
[13] 뉴스 Yamasaki not to run for Upper House https://www.japantim[...] The Japan Times Online 2004-03-22
[14] 뉴스 Yamasaki declares bid to win back Fukuoka Diet seat https://www.japantim[...] The Japan Times Online 2005-01-06
[15] 뉴스 Koizumi gets boost with by-election wins https://www.japantim[...] The Japan Times Online 200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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